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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약 ‘잠’ 을 만드는 독약…꿀잠만 주는 수면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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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01회 작성일 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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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S] 신찬영의 마음의 독, 마음의 약 

제트약물(Z-Drug) 


지중해 연안 몰타의 고도(古都) 발레타 지하 신전에서 출토된, 기원전 수천년 전 점토로 조각된 ‘잠자는 여인’을 보면 고대인들도 좋은 잠을 갈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참 맛나게도 자고 있는 모습이 수면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4당5락.’ 4시간 자면 대학입시에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옛날 말인데 고등학생 막내딸에게 얘기했더니 “제정신이 아닌 말 같다”는 반응이 나온다. 매일 4시간 자고 학습효율이 좋았을 리 없다. 나폴레옹이 하루에 4시간만 잤다지만 낮에는 말등에서도 꾸벅꾸벅 졸았다고 하지 않나. 잠을 안 자고 가장 오래 버틴 기네스북 기록은 1964년 미국의 랜디 가드너라는 고등학생이 세웠는데 무려 11일 동안 한잠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영원히 깨질 수 없는데 정신 착란, 환각, 의식의 혼돈, 근육 경련 등 다양한 건강위험 때문에 ‘잠 오래 안 자기’ 부문을 기네스북에서 아예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을 강제로 안 재운 쥐는 사망한다. 잠은 보약이자 생명이다.


아직은 차선책인 ‘수면유도제’


수면장애는 인구의 약 20% 정도가 경험하며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40% 정도 많이 겪는다. 수면장애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미국에서 연간 130조원에 이를 정도로 막대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집중력, 인지기능, 사회생활 및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수면장애는 대사증후군, 우울증,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을 비롯한 각종 질환과 관련성을 지닌다. 수면장애가 있으면 잠자는 동안 뇌에서 배출되어야 할 아밀로이드가 뇌에 더 많이 쌓이고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거나 악화된다고 한다. 치매 걸리지 않으려면 잘 자야 한다는 것이다. 


수면과 관련된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이 어렵거나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 결국 약물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상적인 수면제는 작용 개시가 빨라야 하며 적당한 지속시간을 가져야 한다. 렘(REM - Rapid eye movement)수면과 서파 수면(slow-wave sleep) 구조를 변동시키지 않아야 하고 자고 난 다음 뇌 기능과 활동성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잠을 깬 뒤 진정 작용이 있으면 안 되고 호흡 부전, 내성과 의존성, 술과의 상호작용이 없어야 한다. 약을 끊으면 반동 작용으로 다시 불면증을 유발하지 말고 술 먹고 필름 끊기듯 기억상실을 유발하면 안 된다. 그러나 ‘이상적인 수면제’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그런 약물은 아직 없다.


감기약 성분인 항히스타민제도 수면보조제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진정-수면제 들은 대개 뇌의 억제성 신경을 활성화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 사용되던 바르비투르산 유도체들은 호흡억제 작용이 심해 1980년대까지 배우 매릴린 먼로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자살 혹은 술과 함께 약을 쓰면서 중독사를 유발한 약물이다. 이후 개발된 벤조다이아제핀 계열의 수면제도 의존성과 내성이 문제가 되며 일부 물질이 수면 마취에 사용되거나 데이트 강간 약물로 악용되는 것이 있을 정도로 선행성 기억상실 작용에 대한 우려가 크다. 진정 작용과 근 이완 작용이 있어 주말 골퍼들 사이에서 소량 먹으면 퍼팅이 잘된다고 소문이 나서 남용이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더 최근에 개발되어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수면제가 ‘제트약물’이다. 이 계열의 약물은 억제성 신경전달 조절에 보다 선택성을 지니며 졸피뎀, 조피클론, 잘레플론의 첫 글자를 따라 ‘지-드러그’라고 불리고 있다. 수면제의 끝판왕이라서 ‘지’(Z)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전히 내성과 의존성을 지닌다. 과량을 복용한 경우 인지기능에 이상을 야기하고 환각 상태와 비슷한 증상을 유발할 수 있어 마약류처럼 오남용되기도 한다. 약물 복용 뒤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일상적 생활, 예를 들면 요리나 운전 등을 하기도 한다. 노년층의 경우 이 약물을 장기 복용하는 경우 낙상 등 골절과 부상 위험 및 알츠하이머 치매 발병 확률이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 장기 복용을 한 경우에는 반드시 몇주에 걸쳐서 서서히 약물 용량을 줄여나가야만 금단증상 혹은 반동작용으로 인한 불면증 악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듯 수면을 약물로 조절하는 것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네덜란드의 연구자들은 효과가 좋은 결과가 나온 경우 더 많이 논문으로 발표되고, 그 반대의 경우 발표되지 않는 이른바 ‘선택적 논문발표’가 수면제의 효과와 부작용에 관련된 과장을 야기할 가능성을 공개한 바 있다. 미국 코네티컷 대학교 연구자들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제출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드러그’가 플라세보(위약)군에 비교할 때 유의미하긴 하지만 경미한 정도의 수면유도 촉진 작용만 보인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위약 그룹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룹에 비해서는 수면유도 작용이 있었다는 것이며, 위약 효과와 ‘지-드러그’의 효과가 합쳐진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룹에 비해 현저한 수면유도 작용이 있었다는 점이다. 수면제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다. 수면 습관의 변화, 운동, 긍정적인 생각 등을 많이 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수면제의 도움을 받는 것이 ‘꿀잠 끝판왕’의 공식일 것이다.


물·음식만큼이나 중요한 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졸피뎀이 사고나 뇌졸중에 의해 식물인간 상태가 된 사람 중의 일부를 어느 정도 주변에 반응이 가능할 정도로 깨우고 신경기능을 증진시키는 작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잠을 재우기 위해 개발된 약물이 식물인간을 의식의 혼돈으로부터 깨우고 돌아오게 하는 작용을 한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선택해야 하는 
빨간약, 파란약처럼 잠의 세계로 혹은 현실의 세계로 이끌 수 있는 물질의 개발이 가능할지 앞으로의 연구가 주목된다.


고등학생 때 잠 안 자기 기네스 기록을 세웠던 랜디 가드너는 70대 후반의 나이에 미국의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중증의 불면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고 방송에서 말했다. ‘물, 음식’ 그리고 ‘수면’이다. 억지로 잠 줄일 일 없고,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날들만 가득한 ‘각성제, 수면제 필요 없는 세상’을 빌어본다.


당신과 내 마음이 다름을 인정하는 정신약리학자. 뇌 발달장애 기초연구 개척자로 뇌질환 동물모델, 기전 연구와 관련해 190여편의 논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