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약물’로 실패한 사랑 잊으면 행복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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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프라놀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영국 <비비시>(BBC)가 선정한 2000년대 개봉한 명작 중 하나로, 많은 이들도 인생 영화로 꼽는다. 때론 끝 간 데 없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상상력이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발휘됐다. 영화는 사랑에 실패한 상대와의 추억만을 ‘기억 지우기 회사’의 도움으로 깨끗이 지우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어렸을 때는 기억력을 좋게 하는 약을 찾고, 나이가 들어서는 치매를 막아주는 약을 찾는다. 바쁘게 살아가는 청장년기에는 오히려 잊고 싶은, 힘들고 아픈 기억들이 많아져 심하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지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게 기억을 마비시키는 약물도 다수 존재한다. 폭음 뒤 종종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 현상과 유사하게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수면 진정제들은 기억 생성 과정을 방해할 수 있다. 수면내시경 전에 투여하는 미다졸람도 이 계열 약물로, 검사 전후에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했던 행동과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벤조디아제핀 계열이 아닌 다른 수면제들도 복용 뒤 운전을 하거나 대화를 한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가끔 보고되기도 한다. 만성 중증 통증 조절에 사용되는 펜타닐, 옥시콘틴류의 마약성 진통제도 기억 과정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실금에 사용되는 약물 중 항콜린성 약물도 기억력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증강시키는 도네페질은 알츠하이머 처방약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항히스타민 계열의 알레르기약이나, 일부 항우울제·항경련제 등도 기억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이런 작용이 졸음을 유발하기 때문인지, 기억력에 직접적 영향이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러한 약물들은 기억의 생성을 처음부터 방해하는 약물들이고, 괴로운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기 위해서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기억은 부호화→저장→공고화 및 재공고화→인출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기억의 의식·무의식적 재생은 재공고화 과정을 통해 기억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안정적 환경에서 잊고자 하는 기억을 회상하며 기억 재공고화 과정을 억제할 수 있는 약물을 함께 처방한다면 빠르게 기억을 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약이 있을까?
고통스럽거나 무서운, 혹은 강렬한 쾌감 같은 기억은 감정적 변화와 연결돼 있다. 뇌 부위 중 강한 감정적 변화와 관련돼 있는 기저외측편도체에서 노르아드레날린성 신경계가 활성화하면, 부정적이거나 유쾌한 기억이 재공고화하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공포, 마약·알코올 중독 등과 연관된다는 동물실험 결과가 보고된 바 있다.
프로프라놀롤이라는 약물은 고혈압약으로 오랫동안 사용한 비교적 안전한 약이다. 심장이 뛰고 혈압이 오르는 불안 증세의 완화 효능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억을 회상할 때 이 약물을 기저외측편도체에 투과하면 노르아드레날린 신경전달을 막아 재공고화를 억제해 감정적 기억의 강화를 감소시킨다. 병원에 방문해 안정적인 환경에서 글이나 말 또는 영상으로 괴로운 기억을 회상한 뒤 프로프라놀롤을 사용하면, 정상인이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에게서 괴로운 기억이 감소하고 스트레스와 관련된 임상적 지표가 개선된다는 보고가 여럿 있다. 물론 효과가 미미하거나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지난해 캐나다 맥길대학의 알랭 브뤼네 교수팀은 흥미로운 결과를 보고했다. 건강한 성인 478명을 대상으로 한 14편의 연구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환자 446명을 대상으로 한 12편의 연구 결과를 메타 분석해 보고한 결과, 통계적으로 분명히 괴로운 기억의 감소와 임상적 효용성이 관찰됐다.
과학이 더 발전해 뇌 부위별 미세 활동을 실시간으로 손쉽게 측정·조절할 수 있게 되면,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오르려고 하는 순간마다 전자기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그 특정 기억의 인출만을 선택적으로 억제하는 폐쇄루프형 선택적 기억 조절이 가능할 수 있다.(<이터널 선샤인>에서도 기억 삭제 시술을 할 때 머리에 전자기 장치를 쓰고 기억을 회상한다)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선택적 기억 삭제는 잊고자 하는 기억의 재공고화를 억제하는 약물을 사용하는 방식이 현실적일 것이다. 프로프라놀롤을 포함한 여러 약물에 대한 추가 연구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대니얼 섁터는 <기억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에서 기억의 단점과 오류를 7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섁터는 △시간에 따른 소멸 △정신을 딴 데 팔면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일 △입에 맴돌기만 하고 생각나지 않는 것 △잘못된 기억 연결 △암시에 의한 기억 오류 △자신의 생각·환경에 따라 기억을 편향되게 윤색하는 오류 △원치 않는 기억이 오래 지속되는 일을 꼽았다. 사고나, 범죄 피해, 전쟁 등 원치 않게 생긴 고통스러운 기억의 제거는 필요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일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권하고 싶지 않다.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는 ‘티끌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빛’이다. 기억은 얼룩을 만든다. 기억을 뒤틀려고 하면 더 많은 얼룩이 묻는다. 그러나 사랑은 아마도 햇살같이, 언제나 온 마음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의 이름은 ‘라쿠나’다. 라틴어에서 유래했다는 이 단어의 뜻은 틈, 빈 공간, 잃어버린 조각이라는 뜻이다.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을 지우면 우리 인생은 공허한 빈 공간으로 남지 않을까.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신찬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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